[사역자설교] 아비, 멜렉 / 사사기 9:1-6 - 이성훈 목사 | 2025.07.20
페이지 정보
작성자 QTnoony 댓글 0건 조회 33회 작성일 25-07-20 12:00본문
날짜: 2025.07.20
제목: 아비, 멜렉
본문: 사사기 9:1-6
설교: 이성훈 목사
1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2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3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4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5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6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제목: 아비, 멜렉
본문: 사사기 9:1-6
설교: 이성훈 목사
1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2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3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4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5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6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여러분 9년 동안이나 자기 이름을 쓰지 못한 이 소녀가 뉴질랜드 소녀가 있다고 그래요. 자기 이름을 못 썼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소녀의 이름이 왜 못 썼느냐? 이 소녀 이름이 탈룰라 더즈 더 훌라 프롬 하와이(하와이에서 온 탈룰라가 훌라춤을 춘다) 탈룰라가 하와이에 훌라 춤을 춘다. 이게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모는 아이가 이름처럼 유쾌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기를 바라면서 이 장난스러운 이름을 지었는데 정작 그 아이는 너무 부끄러워서 그 이름을 쓸 수가 없는 것이고 자신을 T라고 불러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참다가 9살이 되던 해에 법원에 이름 변경 신청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판사가 변경을 허락하면서 내린 판결문에 이렇게 판결을 했다고 합니다. 이건 유쾌함을 넘어선 정서적 학대다. 아이 이름에는 부모의 마음이 담깁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자체가 다 왜곡이 돼 있기 때문에 이름을 잘 짓는다고 해서 또 좋은 이름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이름을 못 짓는다고 그래서 그게 또 나쁜 이름이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들 교회처럼 말씀에 근거하여서 구속사적으로 이름을 짓는 것이 최고의 이름인 줄 믿습니다. 기드온 큐티를 우리가 쭉 했는데요. 오늘부터는 그 아들 아비멜렉에 관한 본문을 묵상합니다. 아비멜렉 오늘 제목이 아비 콤마 멜렉 있잖아요. 아비멜렉, 헷갈리지 마시라고 ‘아비’, ‘나의 아버지’는 히브리어예요. 나의 아버지는 ‘멜렉’, ‘왕’이에요. 즉, 아비멜렉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 왕 되기를 기드온이 거절했는데 왕에 대한 미련이 좀 남았는지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이름처럼 진짜로 자기가 왕이 됩니다. 하지만 이 왕국이 3년 천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왕 같은 자기 아버지 바라보면서 결국에는 자기가 왕이 되었지만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자기 삶의 결론인 것이죠. 그래서 오늘은 우리는 어떤 왕을 섬겨야 되는지 이 아비멜렉의 기가 막힌 인생을 통해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왕을 섬겨야 되는가?
1.'아비, 멜렉'의 방패는 무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비멜렉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기드온, 즉 여룹바알은 아내를 많이 두고 아들만 무려 70명이나 낳았습니다. 한 타스가 아니라 그냥 부대를 낳아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되라는 백성의 요구를 뿌리쳤지만 사실은 기드온 여룹바알 왕처럼 살았단 말입니다. 게다가 여룹바알은 첩까지 두었습니다. 그것도 자기가 살고 있는 오브라가 아니라 세겜에 가서 첩을 두었어요. 그런데 이 세겜이 어떤 동네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주시고 거기서 단을 쌓은 곳이고 또 요셉의 묘지가 있는 곳이고, 또 여호수아가 마지막 결단의 설교를 하면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그러한 유서 깊은 곳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성읍에 여룹바알이 딴 살림 차리고 아들까지 낳아놓은 것입니다. 그 아들이 바로 이 아비멜렉입니다. 내 아버지는 왕이시다. 그런데 이게 여러분 진짜로 왕을 부르는 호칭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말로 하면 대통령이라는 단어와 같은 것이었는데 여러분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그 왕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하세요? 그랄 왕 아비멜렉이었단 말이에요. 이삭도 또 아비멜렉 동일 인물이 아니라 그 블레셋 그랄 지역의 왕을 가리키는 호칭이 될 만큼 이 아비멜렉이라는 것은 굉장히 대단한 이름이었단 말이죠. 그런데 여룹바알의 첩이 낳은 아들에게 이 엄청난 이름을 지금 지어줬다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기 죽지 말라는 것이죠. 낳아놓기는 했는데 키워주지 못한 그 서자를 향한 아비의 마지막 마음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사람들이 놀릴 때 쫄지 말고 당당하게 외쳐라. 내 아버지는 왕이다. 나는 아버지가 없는 그런 비참한 인생이 아니라 내 아버지는 왕이다.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마치 방패를 그 인생에 쥐어주듯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이것이죠. 그런데 아비멜렉의 낮과 밤은 너무 달랐을 것 같아요. 낮에는 이렇게 방패를 높이 치켜들고서 사람들이 야 니네 아빠 어디 갔어? 니네 아빠 없는 거 아니야? 이렇게 놀릴 때마다 아니야! 우리 아빠 없는 게 아니야! 우리 아빠 왕이라고 까불지 말라고 방패를 꼭 쥐고 높이 들고서 버텼지만 집에 돌아가면 어떻습니까? 밥 먹을 사람은 엄마밖에 없는 거예요. 아비멜렉은 이름뿐이고 진짜 자기의 아비는 어디 갔는지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밤이 되면 그 낮에 높이 들고 있던 그 방패의 무게가 고스란히 그에게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죠. 더 서럽고 억울하고 분했을 겁니다. 그렇게 아비멜렉의 마음에는 한이 쌓여가기 시작했을 거예요. 그래서 아비멜렉에게 아버지는 낮에는 방패 같은 보호자 이름만으로도 자기를 지켜주는 방패 같은 보호자였지만 밤이 되면 정말로 자기의 인생을 망하게 하는 비참하게 만드는 그런 짐짝이요 또 배신자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에서 70명의 이복 형제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70명의 형제들이 아비멜렉을 사람 취급했겠습니까? 첩의 자식인데요. 너 같은 게 여기가 어디라고 와!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형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부글부글 끓는 그 마음을 꾹 참고서 세겜, 자기 집으로 돌아왔어요. 1절부터 3절 우리 같이 한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3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아비멜렉은 자기를 지켜줄 새로운 방패를 찾았습니다. 그게 뭐예요? 외가 식구들입니다. 같은 골육임을 기억하라면서 외삼촌들 그 다음에 사촌들에게 부탁을 하는 거예요. 자! 아비멜렉의 70명의 다스림을 받는 것과 너희들과 같은 고향 사람인 이 세겜 사람인 나 혼자서 다스리는 그 다스림을 받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너희한테 좋겠느냐? 그러니까 우리 이 동향 사람 아비멜렉을 지지하자 이렇게 선거 유세해달라는 것이죠. 70명 형제는 자기가 출마한 적도 없어요. 그리고 이 이스라엘의 지금 왕을 뽑는 이 대선이 열린다는 그런 공고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냥 혼자서 제 멋대로 대선판 깔아놓고서 자기 지금 지지해 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선동이죠. 그 이상한 부탁을 하는데도 지금 이 외가 식구들이 다 아비멜렉 편을 들어줍니다. 왜 그래요? 가족이니까 아비멜렉이 시키는 대로 온 동네를 다니면서 아비멜렉을 선전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에는 분명히 이런 사람이 있었을 거예요. 아비멜렉 야! 개, 저 여룹바알 서자 아니야? 그런 애가 어떻게 우리를 다스리는 지도자가 될 수 있어? 그게 말이 돼! 그럴 때마다 외삼촌, 사촌 형들은 ‘아니야 니가 잘 몰라서 그래. 그 아비멜렉이 어려서부터 아비를 아비라고 부르지 못하고 자라가지고 인생이 일찍 철이 들었어. 인생을 좀 알아. 그러니까 우리 지도자가 되면 너무 우리를 잘 살게 해줄 거야. 특히 우리 세겜 사람들한테 너무 잘해줄 거야. 그러니까 우리 이 사람 찍자’ 이렇게 설득했을 겁니다. 유세는 여러분 그래서 대성공이었어요. 대성공해서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아비멜렉에게 마음이 기울었다고 그랬어요. 열혈 지지자가 된 거예요. 딸이 된 겁니다. 딸이 열렬히 지지하는 그 딸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이 모습을 본 아비멜렉의 마음이 여러분 얼마나 든든했겠어요? 이 아버지는 그냥 아비멜렉이라는 이름만 지어놓고 실체는 안 보였는데 정말로 자기를 옆에서 지켜주고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는 진짜 방패와 같은 고향 사람들이 생겼으니 보기만 해도 너무 든든했을 것 같아요. 방패로 지금 둘러싸여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성능 좋은 방패일수록 잘 막아주는 방패일수록 무거운 법이에요. 그렇지 않겠어요? 무거운 법이에요. 아비멜렉이 이 무게를 깨닫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요? 딱 3년 걸렸습니다. 3년 만에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서로 배신해서 서로 치고 받고 싸우다가 결국에는 같이 다 죽게 되는 거예요. 이 든든했던 이 무거운 방패에 아비멜렉이 깔려 죽은 겁니다.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상처와 약점과 실수와 잘못과 수치를 가려줄 방패를 늘 찾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문자적으로 아버지, 어머니 집안 이것이 방패로 삼아요. 부모님이 든든하면 너무 자랑스럽고 그렇지 않으면 너무 낙심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찾는 방패들이 또 뭐가 있어요? 학벌, 직장, 결혼, 자식, 재산 찾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찾아서 끝없이 방황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예요. 무엇이든 나를 지켜주고 방어해 줄 것 같은 그 좋은 방패를 찾아서 그 방패를 손에 쥐려고 수고하고 또 수고하면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런 아비멜렉의 방패는 너무 무거워요. 잠깐 나를 지켜주는 것 같지만 결국엔 나를 짓누를 뿐입니다. 비싼 사용료를 반드시 지불할 날이 온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이 방패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원래 내 것이 아니거든요. 여러분 아버지도 내 자신이 아니잖아요. 아버지도 내 자신이 아닌데 내 것이 아닌데 그 어떤 것이 나를 끝까지 지켜주겠느냐 이 말이죠. 잠깐 하나님께서 사명 때문에 잠깐 허락하신 것이 있을 뿐 결국에는 다 나를 떠나가는 남의 것이다. 다 하나님 것이다 이것입니다.
한 성도님은 초등학교 때부터 사회 공포증, 무대 공포증이 있으셨대요. 남들에게 들킬까 봐서 이것을 진짜 각종 보호막으로 가리고 숨기느라고 너무 인생이 힘드셨다고 그럽니다. 우리들 교회 오셨는데도 이 공포증이 있다 이런 말하는 게 너무 공포스러워서 그냥 불안이 있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셨다고 그래요. 여러분 목장에서 이렇게 나누셔도 여러분들은 다 찰떡같이 알아들으시죠. 그래서 이분이 이 공포증을 막을 방패를 찾으셨는데 생각한 것이 경찰 제복이었어요. 제복 입은 경찰, 그래서 경찰대에 들어가서 내가 제복을 입은 경찰이 되면 나의 이 연약함을 다 가려주지 않겠는가 해서 경찰대를 딱 들어갔는데 거기서 만난 건 무엇이에요? 그 경찰 되려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용감무쌍한 사람들이겠어요? 그들과 또 비교가 되는 거예요. 저들은 저렇게 용감하고 당당한데 왜 나는 이렇게 불안하고 두렵고 늘 떨릴까 더 비교가 되면서 열등감에 더 빠져서 인생이 더 비참하게 되었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 공동체에 와서 이분이 그때 자기의 그 모습이 오픈의 능력을 몰랐던 자기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을 깨달으셨다는 거예요. 오픈이 능력인데 감추려고만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경찰 제복에 방패로 가리려고 했던 것이 결국에는 자신의 악함과 연약함이다 이런 걸 고백하시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 부족함을 오히려 더 목장에서 더 잘 더 솔직하게 나누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기를 소망하신다고 나눠주셨어요. 아멘이시죠. 우리는 내 방패가 크네 작네 약하네 강하네 두껍네 얇네 하면서 기뻤다 슬펐다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깨달아야 될 것은 그렇게 무거운 아비멜렉 방패를 들 수밖에 없는, 들어야만 하는 우리 자신의 죄악인 거예요. 방패가 중요한 게 아니라 왜 내가 그렇게 이 방패에 목을 매고 있는가 왜 이 방패를 놓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게 만드는 내 안에 죄악이 무엇인가 이것을 깨닫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감추려는 죄악이 우리가 해석하고 해결해야 될 문제라는 거예요. 이 모든 죄악을 우리가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그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다 내려놓는 그건 다른 게 아니라 목장에서 나누는 것이죠. 솔직하게 나누는 것이죠. 주님 앞에 다 내려놓으시고 그 자유함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적용질문1.
나를 낳아주신 부모에 대한 마음이 어떻습니까?
너무 무겁지만 더 꼭 붙잡게 되는 나의 '아비, 멜렉'방패는 무엇인가요?
무엇을 가리고 보호하려고 그렇게 꼭 쥐고 계신가요?
2.'아니, 멜렉'의 칼은 무섭습니다.
히브리어의 ‘아니’는 ‘나’입니다. 아니 멜렉의 칼은 어때요? 무섭습니다. 4절 같이 읽겠습니다.
4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아비멜렉의 든든한 방패가 된 이 세겜 사람들이 은 70개를 아비멜렉에게 바치는데요. 요즘 시세로 하면 사실 이게 130만 원 정도밖에 안 돼요. 많이 잡아봐야 은 가격을 하면 그 당시에는 가격이 지금보다는 더 좋았겠죠. 그런데 이 은이 바알브릿 신전에 있던 것입니다. 바알교 신전에 있던 거예요. 우상숭배의 장소예요. 그런데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게 있는데요. 오늘 참 히브리어가 많이 나와서 제가 좀 죄송한데 오늘 본문에 이 ‘세겜의 모든 사람’들이 반복되잖아요. 2절, 3절, 6절에 ‘세겜의 모든 사람들’이라는 구절이 반복되는데 여러분 이 사람들이 히브리어로 보면 이 사람들이 아닙니다. 놀라지 마세요. 이걸 직역하면 ‘세겜의 모든 바알들’, 그러니까 이걸 말하면 지도자들, 주인들 뭐 이런 뜻으로 써 놓았는데 왜 굳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실 때 이 바알들이라는 이 바알 בַּעַּל (baʿal)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가? 그리고 여러분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6장에서 8장까지 기드온은 가끔 여룹바알이라고 하긴 했지만 기드온으로 불렸잖아요. 하지만, 9장에는 기드온이라는 이름이 안 나와요. 기드온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히브리서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예요. 성경에 기드온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아요. 9장에는 여룹바알, 바알과 대적하는 사람, 싸운 사람 이 여룹바알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9장 1-6절을 바알이라는 단어로 도배를 해 놓으십니다. 그만큰 바알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이 하이라이트, 형광펜으로 딱 칠해 놓으신 거예요. 바알을 믿는 작은 바알들이 바알신전에서 지금 바알 작당을 하고 있는 그 흉칙한 모습, 그 타락한 모습 이 전적인 부패, 전적인 배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주 세밀한 문학적인 기법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세겜이 보통 장소가 아니거든요. 영적인 중심지 중에 하나란 말이죠. 그런데 이 믿음의 유산이 담긴 유서 깊은 세겜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쩌다 이렇게 바알 소굴이 되었을까? 이런 의문이 들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 떠나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그래도 한 세대가 이어졌어요. 그런데 기드온이 떠난 후에는 즉시 뒤도 안 돌아보고 이스라엘이 돌아서서 우상숭배, 바알교 숭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만 놔두면 우리는 흘러 떠내려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옆에서 잔소리해주고 듣기 싫은 소리 해주고 계속 쫓아다니면서 너 이래선 안 된다! 저래선 안 된다. 계속 양육해 주는 옆에 그 한 사람이 계시다면 여러분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정말 더 잘 모시고 그 옆에 딱 달라붙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거예요. 바알들이 바알신전에서 갖다 바친 은 70개를 아비멜렉은 어떻게 사용했어요? 깡패들 고용했습니다. 자기 명령 따르는 직속 부대, 깡패 부대 만드는 데 그 돈을 썼어요. 무슨 뜻이에요? 칼을 빼들었다는 거예요. 칼을 지금까지 방패 들고 있었는데 이 방패로는 내가 원하는 뜻을 이룰 수 없다. 상대방이 공격하는 거 막기만 해서는 내가 이 인생의 전쟁을 이길 수가 없다. 내가 힘이 생겼으니 은 70개가 생겼고 지지자들이 생겼으니 나의 칼을 만들어야 되겠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달려가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쓰러뜨려줄 나의 칼을 만들리라 하고서 모은 게 깡패 부대, 양아치 부대라는 것이죠. 이 과정에 깔려 있는 이 아비멜렉의 마음이 뭘까요? 무슨 마음으로 지금 이러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요?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이제는 아니 멜렉 이제는 내가 왕이다. 내 아버지가 왕이라는 거 나 만족 못해. 그 정도 방패로는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룰 수가 없어 이제 내가 왕이 되겠다. 아니 멜렉, 이 아니 멜렉의 칼을 뽑아 들고 이제 그것을 휘두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껏 빼든 이 아니 멜렉의 칼을 이제 아비멜렉이 휘두르는데요. 5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5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아비멜렉의 칼은 그래서 복수의 칼인 거예요. 한 맺힌 거 이복 형제들이 자기 무시하고 그림자 취급했던 것, 아버지는 이름만 딱 하나 지어놓고 나타나지도 않는 그 한을 지금 이 70명의 형들에게 풀어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그 장면을 굉장히 상상해 보세요. 바위 하나 위에다가 이 형제들을 차례로 올라서서 처형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바위가 컸다면 한 번에 몰아놓고서 아주 잔인하게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처형을 했을 수 있어요. 무슨 말이에요? 지금 자기의 모든 그 분과 화를 여기다 본보기로 다 쏟아놓고 공포 통치를 시작하는 것이죠. 바알에게 제물로 바치듯 자기의 모든 과거를 자기가 휘두르는 칼로 싹 다 쓸어버리고 자기 세상 만들었다는 그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아니 멜렉의 칼을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아비멜렉에게 생기니까 결국에 저지르는 것은 이렇게 잔인한 복수인 거예요. 그래서 무서운 칼이고 무서운 결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칼이 무슨 잘못이겠어요? 그 깡패가 나빠서 그러겠습니까? 양아치가 문제겠어요? 그걸 쓰는 아비멜렉이 문제인 것입니다. 칼을 휘두르는 우리 자신의 문제인 거예요. 아비멜렉의 방패를 들고 있을 때도 그 방패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들고 감추려고 하는 우리 자신이 문제인 것처럼, 이제 아니 멜렉의 칼을 휘두를 때도 그 칼이 있고 없고 칼이 어떻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칼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내 자신 안에 감춰져 있는 그 잔인함과 그 폭력과 그 사나움, 그 죄악들을 깨닫는 것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어떤 성도님이 회사에서 최고 매출을 올렸대요. 그런데 이분이 공을 많이 세운 거예요. 그러니까 일이 많아졌겠죠. 그러니까 회사에서 일을 많이 시키니까 같이 팀으로 일하는 분들 중에 불평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소극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자기는 너무 열심히 하고 공을 세우니까 그 꼴을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말다툼을 하다가 급기야 장문의 문자를 주고받는 감정 싸움이 됐고요. 너무 속이 상한 나머지 퇴근 이후에도 장문의 문자를 그것도 훈계조의 문자를 보내면서 이렇게 괴롭혔다는 거예요. 요즘엔 퇴근 후에 그렇게 문자 보내면 큰일 나거든요. 이 노동법이 세져가지고 굉장히 위험한 행동인데 그러다가 산책을 하다가 그게 아마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거 만약에 노동청에 고발하면 나 큰일 나는데 그게 분명히 그런 브레이크가 있으셨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이분이 정신이 번쩍 들어가지고 그때부터 겁이 막 올라오는 거예요. 야 이거 어떡하지? 큰일 났네. 그러면서 심지어 그 다음 날에도 출근하기가 힘들 정도로 마음이 많이 눌렸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때 그날 아침에 큐티인을 열어서 이제 말씀을 묵상을 하는데 그날 드보라의 노래였다는 거예요. 전쟁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 다 일일이 호명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노래를 묵상하면서 자기의 모습이 비쳤다는 거예요. 이거 지금 내가 이렇게 회사 다니면서 공을 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재입사 시켜주신 그 은혜가 있는데 내가 지금 조금 잘 나간다고 조금 힘이 생겼다고 금세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직원들 이렇게 괴롭히는 그러한 자리에 올라와 있구나. 그래서 그 직원에게 자기가 말씀 큐티한 거 보내드리고 정중하게 사과 문자를 보내셨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분이 정말 잘하신 거 뭐예요? 마음이 힘들 때 다른 거 아니라 큐티 했다. 말씀 묵상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다음 잘하신 것은 적용하셔서 그 문자 조금 쪽이 팔리셨겠지만 문자 보내신 것, 진정한 사과를 담아서 문자 보내신 것, 너무 잘하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 칭찬 도장을 꽝 찍어주셨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공을 세우고 우리가 인정을 조금이라도 받으면 우리는 저절로 권위적이 되고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이 잔인한 본성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생각, 의지, 우리의 지식, 우리의 교양으로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어요. 어떻게 억울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오직 오늘 하루 주님의 그 능력의 말씀이 연약한 우리, 사나운 우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리를, 이끌어 주셔야만 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말씀을 가까이해야 되는 거예요. 늘 들어야 되고 띵크 해야 되고 특히 적용해야 되는 거예요. 문자 하나 보내는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 적용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붙드셔서 이끌어 가시는 줄 믿습니다. 지금 내 능력과 의지를 마음껏 발휘하게 해 줄 그 칼을 찾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런 칼이 없어서 마음이 너무 힘드십니까? 그 칼 가진 사람이 너무도 부러우십니까? 아니면 지금 잠시 하나님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서 여러분 손에 휘두를 수 있는 그 칼의 권세를 맡겨주셨습니까? 어떤 경우든 기억하시기 바래요. 아니 멜렉, 내가 왕이 되려는 내 자신의 야망, 욕심이 내가 어떤 칼을 들었던 그것을 무서운 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가장 악한 존재인 거예요. 내 자신이 가장 악한 존재인 거예요. 외과 의사가 칼 들었다고 무섭다고 그러잖아요. 강도가 칼 들을 때 우리는 무서워합니다. 내가 사납고 폭력적이고 권위적이고 악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할 때 칼이 없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또 칼을 잠깐 맡겨두신 거 들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2
"나는 왕이다" 주장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어떤 칼을 손에 쥐려고 합니까?
나도 사납고 폭력적인 악인일 뿐임을 인정합니까?
3. '야훼, 멜렉'의 신앙만이 답입니다.
6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새겜과 그 이웃 밀로라는 요새가 있어요.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세겜의 상수리 나무 곁에 모이는데 그냥 나무가 아니라 상수리 나무 옆에 기둥을 세워놨다. 이건 뭐냐 하면 분명 아세라 목상일 거예요. 상수리 나무도 우상 섬기는 장소로 만들어 버린 것인데 여러분 이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야말로 정말 신앙의 역사가 담긴 유적이에요. 그 나무가 계속 유지되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세겜에 있는 그 상수리나무라는 곳이 굉장한 유적인데 이 세겜의 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주셨고 가나안에 온 아브라함을 만나주셨고 그 다음에 외삼촌 집에서 도망나오듯 한 야곱이 라헬이 가지고 있던 우상 다 뺏어다가 이 나무 아래에다 묻어버린 그 장소이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여호수아가 마지막 설교하고 언약을 맺으면서 그 언약의 증표가 되는 돌을 이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워둔 거예요. 그러니까 언약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이고 우상숭배로부터 멀어지겠다는 결단이 담긴 곳이 세겜의 상수리나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둥을 세워놓은 거예요. 바알교의 신상을 세워놨다는 얘기예요. 작은 바알들 맞죠? 작은 바알들이 완전히 이렇게 바알 숭배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런데 이 6절 한 절에 멜렉 왕이라는 단어가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먼저는 아비멜렉에 나온 멜렉 왕이 나오고요. 그 다음에 우리 말 번역으로는 왕으로 삼으니라 그냥 이렇게 밋밋하게 번역했는데 이 히브리어로 보시면 ‘왕이 되도록 왕을 삼았다’. 왕이 두 번 반복해서 이건 문법적으로도 불필요한 구성이에요. 의도적으로 썼다는 거예요. 멜렉을 하나님께서 세 번을 반복하시면서 또 한 번 강조해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그 의도가 보이시죠? ‘바알’을 강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여기서 ‘멜렉’을 이렇게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강조하실까? 왜 이렇게 하나님이 지금 멜렉을 잘 보라고 잘 생각하라고 형광펜을 칠해 두실까? 여러분 사사 시대를 한마디로 규정하면 무슨 시대예요? 이스라엘의 왕이 아직 없는 시대 그래서 사람들이 저마다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그러한 시대가 사사 시대입니다. 그런데 딱 한 번 왕을 세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오늘 이 9장 1절에서 6절인 거예요. 세겜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서 이 작은 바알들이 하나가 되어서 바알을 섬기는 그 신전 밑에서 그 이름에 걸맞게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기들의 멜렉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장면을 이렇게 강조하시는 것은 이거 큰 잘못이다. 여기에 큰 악이 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작은 바알들이 바알을 섬기면서 자기들끼리 모의해서 꾸민 이 말도 안 되는 범죄다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괜히 왕을 주시지 않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미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에 다른 그런 허접한 왕, 인간 왕들 필요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왕을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을 반복적으로 거부하는 거예요.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가 고난이 오면 다시 잠깐 정신 차려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러다가 고난이 해결되면 다시금 자기들이 왕 되려고 자기 왕 만들어 줄 것 같은 사람들 그 우상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멀리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왕이 없는 게 아닙니다.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왕이신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이 연약한 믿음, 우리의 의심 이러한 것들이 우리 마음이 결국에 이제 문제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제멋대로 나는 왕이다 외치고 그래! 니가 왕이다. 이렇게 하면서 왕으로 세운 이 바알 무리들의 최후가 어떻게 돼요? 이번 주에 우리가 큐티 하겠지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세겜 사람들 다 죽고 세겜성도 다 무너지고, 아비멜렉도 아무 이름조차 없는 연약한 여인이 던진 돌에 맞아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비멜렉이 휘두른 이 아니 멜렉의 무서운 칼이 결국에는 다 죽이고 마는 거예요. 자기들이 왕 만들려고 작당했던 그 결말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묵상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무거운 이 아비멜렉 방패에 드는 수고를 멈춰야 되겠죠. 그리고 무서운 아니 멜렉의 칼 휘두르는 그러한 고생을 멈추고 이제는 야훼 멜렉, 여호와 멜렉, 글자 수 맞추느라고 제가 야훼라고 그랬어요. 야훼 멜렉, 여호와께서 왕이시다라는 참된 신앙 고백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진정한 왕은 내 아비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알죠. 여호와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겨야 된다는 거 다 알아요. 그러나 그게 안 돼서 또 거기에 우리의 슬픔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장사 타이틀까지 따셨던 한 성도님이 나누신 내용인데요. 이분이 선수 생활하실 때는 정말 칼을 휘두르는 그 무서운 코치 밑에서 고생 진짜 많이 하셨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본인이 코치가 되신 거예요. 방패만 들고서 있다가 칼을 휘두르게 되신 거죠. 어려운 팀에 부임해서 그 팀을 세워가려고 잘하는 팀으로 만들어 보려고 전심을 다해서 지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장사를 해보셨잖아요. 최고가 되어 보셨잖아요. 그러니까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보이는 거죠. 그러니까 진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이 선수들을 아주 열심히 트레이닝을 시킨 겁니다. 그런데 모두가 장사가 되는 게 아니잖아요. 선수들이 장사 출신 코치님의 양육을, 훈련을 따라가지 못하는 거예요. 걔 중에는 운동량, 그 운동 시간을 속이다가 걸리는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선수들도 있었다는 거예요.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그랬다는 겁니다. 그런데 걸리면 사과라도 하고 해야 될 텐데 또 거기에 발뺌까지 하더래요. 발뺌만 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또 막 대들기까지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팀의 주장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주장이라면 그 질서를 지킨다면 이런 경우 주장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야 너 그게 지금 코치님한테 무슨 태도냐! 정신 차려라! 주장이 나서서 질서를 잡아줘야 될 텐데 오히려 주장이 선수 편을 들면서 코치한테 같이 대들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기가 막혀가지고 전체 선수들을 모아놓고 따끔하게 타이르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어떤 선수 한 명에게 문자가 왔대요. 코치님 앞으로 선수들이 녹음한대요. 그래서 얼마 후에 선수 중 한 명이 상담 요청을 해가지고 상담하러 만났는데 실제로 그 녹음하는 것을 자기가 발견을 했다는 것이죠. 너무 더 배신감이 들고 더 짜증이 올라와가지고 실망해가지고 너무 힘들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분이 오래 우리 공동체에 있으면서 말씀을 들으셨으니까 머리로는 안다는 거예요. 이럴 때는 진짜 당신이 나보다 옳습니다를 해야 되는데 그거 너무 잘 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선수들 얼굴 보고 그런 모습을 보면 정말 그럴 수가 없어서 너무 힘들다고 이렇게 나누시더라고요. 그래도 말씀 묵상하시면서 인정되는 게 뭐냐면 이렇게 연약한 선수들과 함께 있도록 불러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게 고백이 된다고 이 선수들처럼 자신도 고라 자손처럼 여기에 그저 남아 있는 인생이구나! 하나님이 여기에 남겨주신 것이구나! 이런 고백은 된다고 하세요. 그래서 결국엔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고 내가 지금 코치라고 하지만 결국에 하나님께서는 이 선수들 이 힘든 선수들을 통해서 나를 코치해 가고 계시는구나! 나를 훈련시키고 계시는구나! 나를 양육해 가시는구나! 라는 것이 그런 고백이 나온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게 참 잘 안 된다는 것이죠. 현장에 돌아가면 목장에서는 이렇게 다 나누고 회개해도 예배 시간에 막 은혜 받으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적용을 하지만 막상 선수들 앞에 가면 그게 참 안 된다는 그 연약함을 나누시더라고요. 이렇게 기도 부탁하셨는데 여러분 기도 다 해 주시길 바래요. 왜냐 이게 사실 이분 혼자의 고민이 아니잖아요. 저의 고민이기도 하고 또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고민 아니겠습니까? 머리로는 우리가 다 알죠. 그러나 야훼 멜렉의 순종이 우리 집에서부터 안 되잖아요. 우리 자식들 얼굴 볼 때도 안 되잖아요. 남편, 아내 너무 예배 시간에는 결단을 하고 큐티에서는 결단을 하고 빼곡히 써서 오늘은 남편에게 이렇게 해야 되는데 아내한테 얼굴 딱 보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나오던 말도 굳어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이런 약점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진짜로 기도해야 되고 내가 왕이라는 것은 따라서 우린 진짜 저절로 되는 것 같아요. 그렇죠? 아니 멜렉, 이건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되지만 이 야훼 멜렉은 아무리 양육을 받고 아무리 말씀을 듣고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우리는 끝까지 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할 수 있다. 내가 내 믿음은 내가 지킬 수 있고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게 무엇이냐? 나는 내 힘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이런 교만한 것이 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 저는 안 됩니다. 저는 설 수가 없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저는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저에게 임해주셔야 됩니다. 왕이 다스려 주셔야만 우리 삶이 백성의 삶으로 세워져 갈 줄 믿습니다. 그래서 야훼 멜렉의 신앙은 한마디로 하면 우리 마지막 나눔처럼 우리가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코치를 잘 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코치를 잘 받는 것, 코치를 받고 양육을 받고 시키는 대로 하고 순종하고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정말 야훼 멜렉을 고백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될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 3
“여호와는 왕이시다"를 고백하기 제일 어려운 자리는 어디인가요?
거기서 내가 잘 받아야 할 하나님의 코칭은 무엇인가요?
관련링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