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자설교] 인도함을 받으며 / 시편 45:6-15 - 이성훈F 목사 | 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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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QTnoony 댓글 0건 조회 39회 작성일 25-06-29 11:57본문
6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7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8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9 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
10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11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12 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
13 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14 수 놓은 옷을 입은 그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5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여러분, 우리가 매주 기도하던 제목이 하나 이루어졌는데요. 결혼과 출산이 작년 7월부터 지난 4월까지 무려 10개월 연속으로 상승했다고 합니다. 이게 예, 박수. 박수 한번 치시죠. 이것이요 33년 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요. 정말 우리 목사님 저 주여 부르지면 비주지시면서 우리 같이 매주 이렇게 기도했는데 그 기도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더 열심히 더 간절히 기도해야 되겠어요. 결혼식에서 가장 주목받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바로 신부 입장일 겁니다. 신부가 빛나는 드레스를 입고 꽃길을 걸어갈 때 모든 시선이 신부에게 집중됩니다. 여기저기서 핸드폰 카메라 소리가 찰칵찰칵 들리고요. 또 와 오 하는이 감탄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그런데 신부는 혼자 걷지 않습니다. 아버지 손 꼭 잡고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신랑이서 있습니다. 시편 45편은 결혼식 찬양이에요. 우리 인생 전체가 신랑되신 예수님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나아가는 신부 입장과 같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성령 하나님의 효과적인 능력으로 도우심과 인도함을 받으면서 성자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런 여정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천국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천국은 우리 힘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인도함을 받으며 들어가는 곳이에요. 천국만 그런게 아닙니다. 우리가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순간순간마다 우리가 들어가야 되는 목적지들, 삶의 그 작은 목적지들이 다 있는데 그 목적지에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인도함을 받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천국까지 인도함을 받으려면
첫째로 왕후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6절입니다.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귀인이다.
하나님이여 누가 이렇게 간절히 부를까요? 바로 고라 자손입니다. 고라는 출애굽대 모세에게 반역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땅에 싱크홀, 띵크홀이 아니라 싱크홀이 생겨서 고라와 그 그에게 가담했던 그 일당이 다 삼힘을 받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았어요. 그래서 고라 자손은 말하자면 싱크홀 생존자입니다. 이런 무서운 심판에서 살아남은 것 물론 너무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이 고라자손이라는 명찰은 반역자의 후손이라는 죄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이 고라 자손을 성전 사역자로 세우셨습니다. 반역자 후손이라는 죄패를 단체 사역자로 살아야 했으니이 고라자손은 더 괴로웠을 것 같습니다. 늘 수치와 무시를 당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꼭이 고라 자손 같지 않을까요? 우리는 저마다 죄패를 달고 삽니다. 지우고 싶은 흙사가 우리 각자 다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고 큐티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는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사건과 고난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순간순간 드러나는 우리 자신의 약함과 악함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내가 이렇게 지금 사는게 맞는가?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라고 라고 하는이 고라자손의 고뇌가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마다 하나님이여, 주여, 아버지여, 여호와여 이렇게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인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서질 듯 흔들거리는 나의 의자에 칸신이 걸터 앉아 있으니 주님의 보좌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당장 망해도 이상할게 없는 나의 나라에 살고 있으니 주의 나라를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의 무게를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야말로 상한 갈 때 같은 나의 지팡이에 겨우겨우 기대어 있으니 주의 나라의 규를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라자손 같은 부끄러움과 괴로움이 클수록 주님을 더욱더 간절히 아버지여 부르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부르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7절입니다.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100% 오르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공의로이 온 세상을 가장 공평하고 가장 정의롭게 통치하십니다. 가장 완전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8절과 9절 말씀입니다. 왕의 모든 옷은 모약과 치양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하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으며 왕우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
왕의 오른쪽은 왕의 바로 옆자리 곧 왕후의 자리입니다. 가장 향기롭고 가장 즐거움이 충만한 곳이에요.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를 누구에게 주시 누구에게 주십니까? 누구를 왕으로 세우십니까? 누가이 왕후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바로 우리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믿고 아내가 싫어도 너무 낙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완전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진짜 신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후요 신부입니다.이 이 땅의 남편이나 아내가 부족할수록 진정한 남편이신 주님을 더 사모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도에겐 부족한 배우자도 복의 통로입니다. 그런데 주님은이 존귀한 왕우의 자리에 왜이 수많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왜 굳이 저와 여러분을 이렇게 세우셨을까요? 9절에도 보니까 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다고 하시잖아요. 무슨 뜻입니까? 우리 말고도이 왕우가 될이 자격과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많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많고 많은 사람들을 다 제치시고 저와 여러분을 왕호의 자리에 세우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하고 특별한 선택이에요. 그렇기 때문에이 자리는 우리가 차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셔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자리입니다. 그걸 우리는 그저 받기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주셨기 때문에 절대로 빼앗기지 않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도이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이 자리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받은 상을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환부로 버리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상이 특별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신부, 예수님의 왕후 자리보다 더 특별한 자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상황이라도 아무리 높은 자리라도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왕후 자리에 서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이 특별한 자리를 우리는 결코 떠나서는 안 됩니다. 왕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요. 주님이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 삶의 자리를 지키는 거예요. 왕우의 자리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이 시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게 왕우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내 마음으로는 다른데 가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 만나고 싶습니다.이 자리를 떠나고 싶습니다. 내려놓고 싶습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도망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정말 목숨 걸고이 최고의 능동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서 능동으로 내 자리를 지켜야만 합니다. 최고의 수동으로 하나님께서 거져 주신이 은혜를 최고의 수동으로 받는이 은혜를 지키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라 최고의 능동으로 순종하는 거예요. 어디에서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나의 자리에서 주님의 왕우의 자리에서 최고의 수동은 곧 최고의 능동이고 최고의 능동은 곧 최고의 수동입니다. 떠나고 싶으면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이여 여호와여 부르짖으세요. 큐티책을 펴고 주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이 특별한 자리에 저와 여러분들을 택하고 택하고 빼고 빼서 세우신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십니다. 인생의 어떤 풍락 속에서도 기쁘고 즐겁게 인도함을 받아서 천국에 입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요즘 내가 자꾸 떠나고 싶은 자리는 어디인가요?
힘들 때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여"입니까?
주님이 나를 왕우의 자리에 세워 주신게 믿어지십니까?
제게도 소시적 머리숱이 많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결혼식장에서 나름 멋있게 차려입고 신랑 입장을 했었더라습니다. 그 꽃길 끝에는 화나게 웃으며 그렇지만 또 수줍 수줍게 입장하는 신부가 있었습니다. 제가 첫눈에 반해서 따라다닌 사람이었고 그래서 석달 만에 결혼에 꼬인 했습니다. 주에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저의 할아버지 목사님이 해 주셨습니다. 은혜롭게 예식이 진행되어 이제 성혼 선포 시간이었습니다.이 제일 중요한 시간이잖아요. 도장을 찍는 증인들 앞에서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신랑 이성훈군과 신부 신부 신부네 결정적 순간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을 잊지 못하셨습니다. 장송 결혼식이 너무 감격스러우셔서였을까요? 신부 이름을 그것도 손자 며느리 이름을 까먹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아무 이름이 없는 무명의 신부와 결혼하게 되었고에 퇴장할 때 그 무명의 신부는 씩씩한 발걸음과 씩씩거리는 숨소리로 꽃기를 퇴장했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결혼 첫날부터 이혼 위기를 맞이 맞이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죠. 아유, 할아버지께서 연로하셔서 그러신데 너무 감격하셔서 그러신 건데 그냥 우리가 이해하자. 그러나 아내는 아니 하객 절반이 내 손님이고이 정도 일이면 SNS의 공식 사과문을 올려도 시원찮을 판에 네가 감히 할아버지 편을 들어 극대노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무섭네요. 자, 여러분 재판관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사기를 하시는데요. 재판관이 되어 주시죠. 누가 옳은 겁니까? 도대체 누가 옳은 거예요? 아내와 저 중에 누가 옳습니까? [음악] 제가 옳은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예.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저의 죄패입니다. 저는 제가 옳아야 합니다. 저만 옳습니다. 그러나 그 실체는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자기 자신 혼자 모르는 가장 미련한 바보입니다. 남들은 다 제가 바리새인 걸 아는데 저는 박사하기 따기 전까지 제가 바리새인 걸 몰랐습니다. 박사하기 따기 전까지 아니라 큐티인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주님이 아직이 남편의 자리에 세워 두신 것은 이것이야말로 위일체 하나님의 특별하고 특별한 은혜 선택이라고 고백합니다.
천국까지 인도함을 받으려면 첫 번째는 왕우 자리를 지켜야 하고요.
두 번째는 옛 사람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10절 말씀이에요. 땅의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릴지어다. 내 백성과 내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딸이여, 얼마나 따뜻하고 다정한 부름입니까? 예수님도 12회 혈루증 앓던 여인을 따라 불러 주셨고요. 보아스도 루을 딸이여 불렀습니다. 딸은 연약해서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존재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이 고라자손 시인의 입술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딸이여 불러 주고 계십니다. 연약한 우리를 책임지시겠다는 뜻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따라오라는 뜻입니다. 어디로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까?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말씀을 그냥 한 듣고 넘기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온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삶으로 손과 발을 움직여서 삶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 순종한 데서 멈추지 말고 거기서 만족하지 말고 거기서 다 되었다고 하지 말고 계속해서 사건이 생길 때마다 계속해서 말씀의 귀를 기울이라는 그래서 전 인격적으로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촉구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신 것이 바로 무엇이냐면 내 백성과 내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입니다. 성경에서 여러분 잊지 말라는 명령은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기억하라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잊으라 잊어버려라는 명령은요. 성경 전체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이 한 절에만 딱 한 번 나옵니다. 내 백성과 내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얼마나 절박하고 얼마나 중대하면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에서 이렇게 딱 한 번만 여기에 기록해 두셨겠어요?이 이 보석 같은 명령을 마치 봄을 찾기처럼 성경 안에 꼭꼭 숨겨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처럼이 보석 명령을 발견할 사람들에게 봄을 찾기 위해서 그 봄을 찾은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말이죠. 여기서 내 백성과 내 아버지의 집은 우리의 옛사람을 말합니다. 내가 태어난 뿔이 익숙한 가치관과 문화, 내 삶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적인 모든 조건과 배경을 가르킵니다. 곧 우리 존재의 바탕이고요. 그러나이 존재의 바탕이 죄로 완전히 망가졌고 무너졌고 오염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는 원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옛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생기는이 거짓과 음란. 의도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끌어오르는 미움과 분노와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불평 그리고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가치관과 습관. 이런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옛사람이고 나의 백성이고 나의 아버지의 집입니다. 주님은이 옛사람을 잊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잊으라고 하시지만 이것은 단지 인식의 문제만은 아니에요. 이것은 또한 실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 백성의 조상으로 불러서 선택하셔서 세우셨잖아요. 그때 뭐라고 하십니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어떻게 하라고 하세요? 떠나.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세요. 그래서 잊어버리는 것은 떠나는 것입니다. 끊어내는 거예요. 인식의 전환일뿐만 아니라 실천의 전환, 삶의 전환인 것입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이 악한 생각과 습관과 습관과이 관습을 목장에서 우리가 하나하나 나누고 말씀으로 하나하나 가지쳐서 내고 목장의 처방에 따라서 지체들의 처방에 따라서 멈추는 적용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잊어버리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옛사람을 잊어버리는 것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이는이 두 가지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이라는 거예요. 비례 관계에 있다는 거예요. 말씀의 귀를 기울이는만큼 옛사람을 잊어버리게 되고 옛사람을 잊어버리는만큼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하는만큼 말씀이 들리는 것이고 말씀이 들리는만큼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과 내 아버지의 집인 나의 옛사람을 잊어버리는이 회개의 유일한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내 영혼을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려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인이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묵상해야 되는 거예요.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으로 묵상하면서 회개하고 적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큐티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돌이킬 때 돌아설 때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11절 말씀이에요. 그리하면 왕이 내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내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우리의 아름다움은요. 외모나 성품이나 재능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주님이 아름답게 보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 뿌리깊게 우리 뿌리깊이 내리고 있는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는이 옛 사람을 잊어버리려는 우리 매일매일의 몸부림입니다. 회개의 큐티입니다. 날마다 큐티하는 사람, 그래서 날마다 회개하는 사람이 주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인 것입니다.이 이 아름다움을 주님이 어떻게 한다고 하세요? 사모한다고 하세요. 사모한다. 우리가 사모한다 그러니까 굉장히 점장고 고상하게 들리는데요.이 원문으로는 그런 뜻이 아니라 너무도 갖고 싶어서 탐이 나서 꼭 가지고 싶다는 그 열망을 나타내는 단어예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뜻합니다. 우리가 날마다이 사랑을 하나님의이 뜨거운 사랑을이 열심을 새롭게 받고 있지 않습니까? 큐티하는 시간마다 목장으로 모일 때마다 이렇게 예배로 모여서 예배드릴 때마다 주님이 세상적으로는 볼품 없는 것 같은 우리들을 주님이 더욱 아름답게 빚어 주시고 그 아름다움을 더욱 사모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이 사랑을 힘입어서 힘든 고난 가운데서 어려운 사건 가운데서 인생이 무너지는 그 상황 가운데서 오늘 다시 말씀을 펴고 오늘 다시 옛사람을 잊어버리고 오늘 다시 회개하고 오늘 다시 십자가지는 순종을 하는 것이 우리 인생 최고의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주님으로 경배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을 통하여서 주님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옛사람을 잊어버리고 주님이 저보다 오르십니다 고백하는 것이 그렇게 우리의 고백으로 주님을 경배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우리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서 천국에 들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드리겠습니다. 요즘 내가 더 옳다고 주장하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옛사람을 잊고 최고의 아름다움인이 회개를 하기 위해서 이번 주 어떤 적용을 하시겠습니까? 요즘 말씀이 잘 들리십니까? 날마다 큐티하고 계십니까?
천국까지 인도함을 잘 받으려면 첫 번째 왕우 자리를 잘 지켜야 되고요. 두 번째 옛사람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세 번째는 서로 이끌고 이끌리며 함께 가야 합니다.
12절이에요. 두로의 따른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내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
두로의 딸 즉이 두로의 백성은요 부자의 상징이에요. 두로는 늘 부자 도시였거든요. 그런 부자 중에서도 두로 백성 중에서도 특별히 부유한 자가 부한 자가 왕우의 얼굴 보기를 원할 것이라고 말씀합십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저와 여러분이 성도들을 우어러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신부의 얼굴이나 성품이나 재능이나 배경이나 조건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가 저와 여러분이 주목받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보다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모든 존재들보다 영화로우시기 때문에 바로 그 옆 오른쪽에 앉아 있는이 왕우도 저와 여러분도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종귀함은 여기서 끝나는게 아닙니다.
13절이에요. 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놓았도다.
하나님께서 딸이여라고 불러 주시는 왕후 저와 여러분인이 그리스도의 신분인 우리가 모든 영화를 누린다고 하세요. 영화를 부스러기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화를 누린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디에서 누린다고 하세요? 궁중에서 궁중에서 궁궐 안에서 가장 영화롭게 된다고 하십니다. 왕우가 가장 영화롭게 되는 곳은요. 군걸 바깥이 아니라 군걸 아닙니다. 그래서 다른 고라자손의 그 시인 시편 84편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첫날보다 나은즉 왜 주의 궁정이 이렇게 좋을까요? 다른 이유가 아니라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 예수님께서 그 궁정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왕우가 또한 금으로 수놓은 옷을 입었다고 하시는데요. 이것은 갑비싼 명품 옷을 가르치는게 아니죠. 주의 궁정에서 우리가 옷 입는 것은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이 무슨 무엇일까요? 성자 예수님은 revealed will of God이시잖아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그 성육신적인 일들 중에서도 그 십자가 죽음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요. 주님의 십자가, 주님이 지신 그 험한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고지는 것이고요. 고백하는 것이고요. 나아가서 주님께서 지금 내 힘든 삶의 자리에서 지금 당장이라고 당장이라도 떠나고 버리고 싶은 나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맡겨 주신이 사명의 십자가를 잘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고요. 다른 말로 큐티하는 것이고 당신이 나보다 옳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평생 큰 소리로 싸워 보신 적이 없습니다. 제가 본 기억은 없어요. 그런데 저는 결혼 후에이 고성이 오갈뿐만 아니라 공중으로 물건이 날아다니는이 아주 다이나믹한 광경을 그저 앉아서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제가 직접 연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입으로 이런 말씀드리긴 참 죄송합니다만 저는 참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오죽 이성적이면 이름에 이성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겠습니까? 그래서 싸울 때도요. 최대한 흥분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화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화가 나면 야부터 외쳤습니다. 얼마 전 목사님께서 아내가 남편을 야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우리 아내분들 기억하시나요? 저는 겉으로 티는 못 냈지만 속으로 그 말씀에 큰 소리로 아멘 했습니다. 저의 본가에서는 저를 부를 때도 늘이 목사, 목사 받기 전에는 이전도사 이렇게 부르셨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내가 외치는 그 야가 저를 가르키는 건지 전혀 몰랐습니다. 아가 사람을 가르키는 단어들이 단어더라고요. 돌아보면 저와 아내의 그 싸움의 목표 자체가 달랐던 거 같아요. 저는 잘 살아보려고 그랬거든요. 근데 이게 말씀이 들려서 잘 살아보려고 그런게 아니라 제 체면이 중요해서 목사의 체면이 중요하니까 그랬습니다. 잘 살아보려고. 그러나 아내는 결혼 첫날부터이 엑스는 하루 빨리 이혼하는 것이 내 인생의 답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로 시작해서 각종 물건 포탄이 날아다니는 그 전쟁 가운데 저희 집에는 그 육인조로 사 놓았던 그 그릇 세트들이 어느 지나고 보니까 어느 순간에 가족소에 맞게 3인조가 되어 있더라고요. 제일 힘들었던 것은요. 아이, 그릇을 던질 거면 싱크대에다 던져 주면 얼마나 좋아요.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치우기 편하잖아요. 효율적 아닙니까? 성질은 성질대로 풀고 잘 쉽게 잘 치우고. 그런데 아내님께서 접시를 어디다 던졌겠어요? 바닥에다 던지는 거예요. 바닥에다 던져 버렸습니다. 던진 것도 모자라서 던져 놓고서는 그냥 횡하니 집을 나가 버리는 거예요. 그때 우리 아들이 몇 살이었냐? 아직 걷기도 전 겨우겨우 기어다니던 때였습니다. 돌도 지나기 전이에요. 6개월, 7개월, 8개월 그 무렵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해야 돼요? 아이가 기어다니다가 그 그릇 파편에 파편 만지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아이를 들쳐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씨 걸레, 젖은 걸레, 마른 걸레, 기름 걸레 윤내는 걸래까지는 아니더라도 저의 집에 있는 청소도구인 기친타월 빗자로 진공 청소기, 돌돌이 물티슈까지 총 동원해서 산산히 부부서져 있는 그 유리 조각들을 깨끗하게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깨끗하게 다 치웠습니다. 그런데 진짜 비참함은 이것이 아니었어요. 진짜 비참함은 그 이유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힘들게 다 치우고 아이를 겨우겨우 재우고 이제 제방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제방에는 무엇이 있었느냐?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라틴어와 헬라어와 영어와 독일로 된 신학책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이런 공부를 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작은 일이 아니라 큰 일을 할 사람인데 도대체 지금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습니다. 그렇게 아내를 미워하고 주변 사람들을 탓타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저 여자 때문에 인생이 망했다. 감히 큰 일 할 목사인 나를 이렇게 괴롭히다니 저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사탄이다. 이런 생각까지 했습니다.이 생각을 목사 안수 받는 그날에도 했습니다. 당시 17층에 살았는데 마음이 너무 힘들 때면 1층을 바라보게 바라보면서 뛰어내려야 되겠다 이런 생각까지 했었더랬습니다. 참고로 제가 얼마 전 설교해서 이제 아내의 수고가 그쳤습니다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서운해 하시면서 걱정을 해 주시더라고요. 아, 그 걱정을 제가 너무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그릇 던지는 수고만 그친 것이니까 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자,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그 교회의 지체로서 잘 머무르는 거예요. 여러분 옷을 우리가 몸에 딱 붙는 옷 입을 때도 있고 좀 저처럼 펑포짐하게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편하잖아요. 그러나 그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 어떤 옷이든 몸에 붙어 있는 거예요. 그렇죠? 몸에서 떨어지면 큰일 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딱 붙어 있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리스도로 온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렇게 그리스도로 옷 입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4절과 15절 말씀이에요. 수놓은 옷을 입은 그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갈 것이라.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왕우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왕께 스스로 나가는게 아니에요. 아무리 좋은 자리 이제 앉았다고 왕우의 자리에 올랐다고 스스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도함을 받으며 들어갑니다. 누구의 인도함을 받습니까?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시듯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주님의 왕후이 그리스도의 신부는요. 혼자서만 성령께 이끌려서 왕궁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시중 시종하는이 친구 처녀들을 이끌고 그들과 함께 왕궁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친구 처녀들을 친구 처녀들은이 왕우가 이끄는 대로 이끌림을 받아서 이끌려서 왕우와 함께 왕궁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주께로 이끌어야 할이 친구 처녀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의 가족과 지체와 이웃입니다. 특히 아직 주님을 믿지 않는 그래서 아직 주님의 왕우 자리에 서지 못한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친구 처녀들인 거예요.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는 성령께 인도함을 받는 자이자 동시에 가족과 지체와 이웃을 신랑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성도는 혼자만 천국에 들어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구원은 혼자서 받는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지체들과 함께 교회로 불러 주셨어요. 그래서 성도는 서로 이끌고 이끌려서 함께 천국에 들어가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이끌고 이끌리면서 함께 인생의 여정을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기쁨과 즐거움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입니다.이 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우리가 인도함을 잘 받아서 마침내 주님께서 계신 그 왕궁에 영원한 하늘나라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릇이 날아다 날아다니는 그 전쟁 통해서 아내 그릇을 던진이 아내의 마음이 더 곤고했는지 결국 저보다 먼저 아내가 우리들 교회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교회에 와서 말씀이 들렸습니다. 말씀 앞에 엎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저에게 나 같은 사람과 사라줘서 고맙다고 먼저 고백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학 박사인 제게 큐티인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목사 가정에서 자라서 목사인 저를 우리들 공동체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저희 가정은 우리들 공동체로 인도함을 받아서 지금까지 가정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서로 앞서기 뒤서 하면서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이제는 그릇을 상대방을 향해 던지지 않고 스스로에게 말씀을 던지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참 지금 생각하면 제가 그 당시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너무 부끄러워요. 뭘 믿고 그렇게 자신 만만했고 뭘 믿고 그렇게 높은 마음을 품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저는 정말 아무래도 쓸모가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인생이에요. 그러나 이처럼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같이 받고 있기에 이렇게 쓸모없고 이렇게 교만하고 나만 옳다는 죄패를 붙이고 있는이 고라 자손 같은 저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과 함께 왕궁에 들어가리로다.이 찬양을이 고백을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공동체에 잘 붙어서 성령의 인도함을 함께 잘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아멘. 이번 한 주도 여러분 정말 힘든 삶의 자리에서 그 상황에서 그 환경에서 매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십자가지는 적용으로 가정과 목장에서 학교와 일터에서 가족과 지체와 이웃을 주님의 몸인이 교회로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서로 이끌고 이끌려 함께 한 걸음씩 나아갈 때 우리 모두 하나님의 왕궁에 들어가는 가장 복된 인생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적용 질문입니다.
요즘 내 삶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주의 공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첫날보다 낫습니까?
나는 목장에서 지체들에게 이끌림을 잘 받고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야 할 사람 누구입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지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행복이 아닌 거룩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까? 첫째는 주님이 은혜로 주신 왕우의 자리를 지켜야 됩니다. 둘째는 내 백성과 내 아버지의 집인 나의 옛사람을 잊어버려야 됩니다. 셋째는 서로 이끌고 이끌리며 함께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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